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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24949016 |
|---|---|
| 쪽수 | 328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문학 > 외국문학비평/평론
AI추천 이유
언어, 광기, 죽음, 존재에 대한
이례적이고 독보적인 미셸 푸코의 저작
사물이나 주체를 가리키는 일을 멈춘 언어가
말하고 있는 극한 지점에 대하여
1963년에 출간된 『레몽 루셀』은 미셸 푸코의 거대한 사상적 연대기 속에서도 가장 이례적이고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책이다. 같은 해 출간된 『임상의학의 탄생』과 나란히 놓이고, 2년 앞서 『광기의 역사』와 3년 뒤 출간될 『말과 사물』 사이에 자리하는 이 책은 푸코가 평생의 연구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정면으로 탐구한 문학 연구서다. 그러나 『레몽 루셀』은 통상적 작가론이 아니다. 푸코가 루셀이라는 기묘한 작가에게서 발견한 것은 언어가 인간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이기를 그치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자 그 순간에 열리는 광기와 죽음, 부재와 반복의 낯선 공간이었다.
당시는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 등 구조주의가 프랑스 지성계를 휩쓸던 시기였다. 그러나 푸코의 관심은 언어를 지배하는 체계의 내재적 규칙을 밝히는 데 있지 않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언어가 사물이나 주체를 가리키는 일을 멈추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말하기 시작하는 극한의 지점이었다. 더욱이 이 책에서 푸코는 훗날 자신의 학문적 표지가 될 ‘고고학’이라는 방법론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특정 텍스트의 특이성 속으로 직접 진입하여 언어와 광기, 죽음과 존재의 문제를 추적한다. 분석자의 언어와 분석 대상의 언어가 서로 뒤섞이는 독특한 문체, 두 목소리가 끝없이 서로를 반박하는 제8장 「유폐된 태양」의 대화 형식은 그러한 실험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세계를 충분히 포괄할 수 없는
언어가 가진 근원적 결핍!
그렇다면 왜 ‘레몽 루셀’이었을까. 루셀의 글쓰기에는 언어가 세계를 충분히 포괄할 수 없다는 근원적인 결핍이 누구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무수한 사물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지칭할 말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말은 서로 다른 여러 사물을 가리켜야 하고, 아주 비슷한 소리를 가진 말들이 전혀 다른 의미의 세계를 열기도 한다. 푸코가 주목한 ‘기표의 불안’은 바로 이 간극에서 발생한다. 루셀은 이러한 언어의 빈곤을 결함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무한한 문학적 형상을 만들어 내는 기계로 전환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루셀이 사후에 출간하도록 한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에서 공개한 ‘기법’(procédé)이다. “비야르”(billard, 당구대)와 “피야르”(pillard, 약탈자)처럼 음운적으로 극히 가까우면서 의미상 아무런 관계가 없는 두 표현을 출발점과 종착점으로 설정하고, 그 사이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한다. 말들의 미세한 차이가 서로 아무 관계도 없던 두 세계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때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최초의 힘은 작가의 체험이나 내면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있다. 루셀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언어가 스스로 이야기를 생산하도록 작가 자신을 그 과정에서 지워버린다.
반복과 이중화!
극도로 의식적이고 철저하게 통제된 기술이 만들어 낸
언어의 근원적 우발성, 그 처절한 실패이자 성공의 기록에 대하여
루셀의 글쓰기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과 정반대 지점에 놓여 있다.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그의 작품에 넘쳐나는 환각적인 이미지에서 무의식의 자유로운 분출을 발견했지만, 푸코가 본 루셀의 기법은 오히려 극도로 의식적이고 철저하게 통제된 기술이었다. 우연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정한 조건을 엄격하게 따라감으로써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철저한 통제 때문에 역설적으로 언어의 가장 근원적인 우발성이 드러난다. 왜 이 소리가 이 사물을 가리키는가, 왜 언어는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는가. 루셀은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언어의 근거 없음 자체를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다.
루셀의 작품을 지배하는 반복과 이중화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의 언어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완전한 원을 이루려 하지만, 동일한 말로 돌아온 순간 그 말은 이미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출발과 귀환은 일치하면서도 어긋난다. 『아프리카의 인상』의 기묘한 기계들, 『로쿠스 솔루스』의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장치들, 괄호 속에 또 다른 괄호가 끝없이 삽입되는 『새로운 아프리카의 인상』은 모두 이러한 언어의 운동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다. 언어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결코 완전히 돌아갈 수 없으며, 바로 그 실패에서 또 다른 이미지와 이야기, 또 다른 세계가 태어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루셀의 삶과 죽음 또한 작품 바깥의 전기적 일화에 머물지 않는다. 젊은 시절 자신의 작품이 세계적인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황홀경을 경험했던 루셀은 그 영광의 상실을 견디지 못해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1933년 팔레르모의 한 호텔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푸코는 그의 광기를 작품의 원인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황홀경의 획득과 상실, 반복과 폐쇄, 광기와 죽음의 궤적을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과 교차시킨다. 루셀이 잃어버린 ‘도덕적 태양’의 영광은 마침내 자신의 광선을 내부로 모두 회수한 ‘유폐된 태양’이라는 이미지로 귀결된다.
자기 자신을 되풀이하며 매번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언어의 미로 속에서 우리가 만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레몽 루셀』은 그래서 한 괴짜 작가를 복권하는 책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에는 『광기의 역사』에서 『말과 사물』로 나아가는 초기 푸코의 사유가 응축되어 있는 동시에, 이후 그가 ‘저자’와 주체의 문제를 다시 묻게 될 사유의 단초도 자리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이 언어를 지배하고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익숙한 믿음을 뒤집는다. 우리가 언어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언어가 우리를 통과하면서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저자가 사라진 뒤에도 언어는 어떻게 끊임없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는가.
푸코가 루셀에게서 발견한 것은 세계에 비해 가난한 언어가 바로 그 결핍 때문에 무한히 풍요로워지는 역설이었다. 이름보다 사물이 많고, 말은 세계를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말이 다른 의미를 품고, 동일한 소리가 낯선 세계로 갈라지는 순간 그 빈곤은 무한한 생성의 가능성으로 뒤집힌다. 『레몽 루셀』은 그 기이한 순간을 끝까지 추적한 책이다.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직조된 루셀의 폐쇄된 언어의 미로 안에 들어간 푸코는 그곳에서 언어가 인간의 표현 수단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독자적인 존재가 되는 광경을 발견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언어가 자기 자신을 되풀이하면서도 매번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이 미로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만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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