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작가의 말
1부 죽음의 기억
열일곱
기차와 녹색방
단절, 다시 원점
2부 베를린, 생명의 시
탈수와 금단
엄마가 보내온 천사
가난과 사랑
하늘에서 들려온 노랫소리
3부 세상 온갖 고통의 소리
어느 특별한 장례
등 파는 소녀
백일간의 사랑
너는 나다
[본 문]
『빛과 소녀』 책 속으로
끔찍한 기억의 단상들이 트라우마의 언어와 절제된 일러스트로 표현되다
구타의 기억은 끔찍하다.
머리가 멈추어 버린다.
몸 어딘가에선 기억하고 반응하는데
헌데도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없다.
달린다, 달린다.
마치 뒤에서 악령이라도 쫓아오는 듯
줄행랑을 치며 달린다.
넘어져도 상관없다.
— p. 35
언제였던가. 그것은 아주 어릴 적이었다.
밤에 이어진 몸 대 몸의 기억.
목이 졸리고, 가슴이 더듬어지고, 옷이 벗겨졌다.
울부짖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리사에겐 갈 곳이 없다.
얼어붙었던 그 순간, 눈앞에 다가오는 그의 얼굴.
리사는 꼼짝도 할 수 없다.
눈을 질끈 감았다.
— p. 37
90년대, 정신과 치료에 대한 고발이 아닌 담담한 기록
입속에 쑤셔 박은 세탁기 배수관만 한 호스가 리사의 위장 속에 이름 모를 약물을 흘려 넣고 있었다. 한참인가 위장 속으로 차디찬 액체가 흘러들었다. 백의(白衣)의 천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곳의 간호사는 죄다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간간이 눈에 띄는 의사도 녹색 옷을 입었다.…… 토악질이 시작되었을 때, 리사는 그것이 멀미 나는 녹색으로 인한 온몸의 거부반응이라 착각했다.
“어이구,
다 그냥 확 뒤지지.”
“저런 것들,
그냥 죽으라 해.”
— pp. 48–49
“다이아제팜 5밀리.
야, 잡어, 더 묶어.
꽁꽁.
잡어, 묶어, 더 꽉.
제길, 저런 것들,
그냥 죽으라 해.”
— pp. 52–53
성폭력의 후유증과 정신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맞서지 못하고 무너지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너 그. 그. 그거지.
너 멘탈 이상하지?”
“여기서 나가줘.
윗선엔 보고했어.
넌 안 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딱 그 지점에서 사지가 얼어붙어 버렸다. 몸속 깊이 감춰진 귀소본능에 이끌려, 간신히 어찌저찌 집에 돌아온 듯하다. 그렇게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리사는 자신의 집, 방구석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 pp. 69–70
이국땅 독일에서 코카인·헤로인 중독자와 함께한 병동생활, 그곳에서 시작된 갱생
낯선 자들의 거리,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기타를 치는 걸인, 저들과 나는 무엇이 다를까.
어린 갱 소년, 한밤중에 병실에서 리사에게 빼꼼히 얼굴을 들이민 한쪽 눈이 일그러진 헤로인 중독자, 분노 조절이 되지 않는 이탈리아 아저씨가 패거리를 지어 리사에게 달려들어 담배를 구걸했고, 간호사가 이 광경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와 간신히 제지했다.
— pp. 91–92
이국땅에서 경험한 기적 같은 빛과의 만남
“가지 마,
거기 있어.”
할아버지는 리사에게 담배를 건넸다. 도망치려는 찰나에 리사의 심장에서 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떨리는 눈을 들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알코올과 마약에 절어 반생이 불구가 되었다는 석화된 그의 몸에서 빛이 발했다. 리사는 헛것을 본 것처럼 뒤로 주춤 물러나 눈을 비볐다. 하지만 진짜였다. 온통 눈이 부시게 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pp. 100–101
그가 건넨 담배 하나가 리사에겐 촛불과 같았고, 그가 발한 빛은 새 생명과도 같았다. 그의 부름에 응답하였고 리사는 다시 연결되었다. 결핍과 고독과 상처는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까지 앗아갔었다. 그런데 이젠, 사람이 간절히 그리웠다. 그리고 다시 사랑이 하고 싶었다.
— p. 102
재활의 순간 찾아온 사랑, 지독한 가난 그리고 새 생명
그가 리사에게 다가왔을 때 리사는 막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는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난 지 3년째 된, 리사에겐 대선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갱생을 결심하고 벌이가 얼마 안 되는 직업생활과 취미활동을 시작했다. 그 역시 대단해 보였다.
— p. 106
또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석 달이 지나고 리사의 배가 불러왔다. 리사는 태어나서 최고로 행복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쁨에 넘쳤다. 리사는 청혼했고, 레오는 승낙했지만 이내 낯빛이 어두워졌다. 리사는 불안했다.
“무엇이 꺼려져, 레오?”
“난 돈이 없어.”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간신히 현실을 파악한 리사가 한참 뜸 들인 후 답했다.
“나도 돈 없어.”
“난 직장도 없어. 결혼하려면 집을 얻어야 하는데.”
— pp. 108–109
또 네 집, 다섯 집을 지나 여섯 번째였다. 추운 길거리에서 리사의 다리 사이로 뜨거운 물이 흘러나왔다. 리사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멈추지 않고 뱅글뱅글 돌아갔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베를린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쓰러졌다.
— pp. 112–113
이번 이별은 아주 오래 걸릴 거야.
내가 원해서 떠나는 게 아니니까.
앞으로 한동안 무지하게 힘들겠지만
우린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아.
이별, 그것은 기쁨도 슬픔도 없이 불어닥쳤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어떤 감상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렇게 리사는 베를린을 떠났다. 레오는 말없이 탑승 게이트를 지키고 서 있었다.
— pp. 125–126
귀국 후 산사를 찾은 리사, 그곳에서 찾은 치유와 화해의 시간
거친 자갈을 걷어내면 알알이 드러나는 시냇가의 모래 부스러기처럼 더욱 또렷해지는 낱낱의 순간들, 신기하게도 살아오며 겪은 아픔만이 한 덩어리로 뭉친 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다 보면 전각 안에 고요히 펼쳐 놓은 방석 위인데도 몸을 가눌 수 없고 갸우뚱 한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고통스럽다는 저마다의 사연은, 벽에다 대고 외쳤다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다만 각자의 몫일 뿐이었다. 또다시 혼자 남겨진 시간의 고통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 내야 했다.
— pp. 136–137
등 파는 소녀를 만나다
한 손엔 연등을 쥐고 다른 한 손엔 접수증을 거머쥔 앳된 그녀는 고작 열다섯 남짓으로 보였다. 남루하다 못해 헐벗어 보이는 그녀는 외진 산기슭에 달랑 티셔츠 한 장에 다 헌 청바지를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서 연등을 팔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삼촌이 밤에 문을 따고 들어와서…….”
리사는 말문이 막혀 ‘악’ 소리를 질렀다.
“계속 계속 말하고 싶어요. 말하고 나니 기분이 좀 좋아져요. 갑자기 배가 불러왔어요. 아버지가 마구 때렸어요. 뭔 그런 짓을 하고 돌아다니냐고. 죽고 싶어서 도망을 갔는데, 부모님은 더 이상 보지 않아요. 아예 연락 안 해요.
저 위에 암자에서 살게 되었는데 빨래하고 있는데 아기는 하늘나라로 갔어요. 절에선 극락이라고 해요.”
— pp. 147–148
산사에서의 생활과 소녀와의 만남, 과거와의 화해
먹구름 같은 머릿속.
끊어지지 않는 한 생각, 아니 오만 생각들.
모든 것이 환영들.
숨이 점점 가늘어지고
머리도 가슴도 멎는다.
한밤의 법당엔 따뜻한 빛이 깃든다.
눈을 뜨면 항상 그곳에 있는 붓다는,
빙그레 웃다가 아름답다가
한낱 불상이었다가 그리고 멈춘다네.
마침내 사라진다네.
— pp. 173–174
어느 날, 해맑은 소녀 곁에서 숨이 점점 가늘어지고 머리도 가슴도 멎었다. 그렇게 한밤의 법당엔 따뜻한 빛이 깃들었다.
리사는 가만히 그 빛 속에 앉아 있었다.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고, 지나간 일도 지워지지 않았다. 아픈 기억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이 전처럼 리사를 물어뜯지는 않았다. 한때는 온 세상 같았던 슬픔이 이제는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멀리 밀어낼 필요도, 애써 붙잡을 필요도 없었다.
빛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거기에 있었다.
리사도 그저 거기에 있었다.
세상이 본래 그러하고, 종교는 위로하고, 사람들은 기도한다. 흩어지는 영상들, 조각난 감정들을 붙잡지 말라지만 자신에게는 그냥 날려 버리기가 무척이나 소중해 리사는 그것들을 모아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첫 소설의 주인공은 저 소녀가 될 것이었다.
— p. 174
소녀와 노보살과 함께하는 조용한 일상에 리사는, 조그맣지만 소중한 방을 꾸몄다. 책상 책장 필기구, 어릴 적 방과 비슷하게 배치한 공간, 그곳에서 뇌리에 이따금 옛날처럼 번쩍번쩍 신호탄이 울렸다. 멈추었던 한 지점에서 글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고통 속의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써 보겠노라 포부는 야무지지만, 젊은 날의 치열함은 그 열기가 가신 듯하다. 나이 듦에 날카로운 펜촉도 몽그라짐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멀게만 느껴졌던 이 세상도 리사에겐 이젠 모두 하나이구나.
—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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